조선시대 기초화장 부터 색조까지 조선 데일리 메이크업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서양국가들과의 개항에서 엿볼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과 1886년에 체결한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102] 또한 시대변화를 감지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김홍도가 그린 ‘씨름’은 단옷날 씨름 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는 총 22명의 인물이 있는데, 제각기 다른 행동, 다른 표정, 다른 얼굴로 그려져 있어요. 갓을 쓴 양반들과 일반 평민들이 같이 씨름 경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볼 때 엄격했던 신분제가 조선 후기에 서서히 완화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위 수 개가 모여서 군단 도지휘사사를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인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지은 “기쁘구나 어쩌다 봉래섬에 잘못 들어와, 신선 고을의 풍류 분들을 만나게 되다니”41라는 시에 나온 ‘봉래섬’이란 곳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 산 사람이 가 있다는 것은 사랑에 신비스러움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대개 현실에서는 다가가기 어려운 ‘불가침(不可侵)’의 영역을 의미했다. 『최척전』에서 최척이 옥영에게 보낸 답서(答書)에 “봉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 약수는 건너기 어려웠습니다”42라고 말한 것은 마음과 실행, 감정과 도리,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그만큼 멀었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농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적정 규모의 토지가 있어야 하는데 대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박지원은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잘사는 사람들이 농지를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민중사상을 전파하거나 실천했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존재는 현실의 정치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저항적 지식인으로서 地師나 儒醫, 學長 등에 종사하던 인물들이었다. 한편, 18세기 말엽 이래 서학이 수용되고 19세기 중엽 이후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졌다.


그리고 끝에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들의 장례의식을 첨가했다. 이것은 당시 중국과의 긴박한 긴장관계 속에서 국방력이 강화되던 추세와 관련이 있다. 양성지가 주도한 지리지 편찬 사업은 1478년(성종 9년) 완성되어 《팔도지리지》(8권)라 하였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기럭아비는 기러기 한 쌍을 들고 신랑이 탄 말보다 앞서 갔어요. 이 기러기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부에게 줄 선물이에요. 기러기는 한번 짝을 지으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는 금슬 좋은 새이지요. 그래서 신랑은 기러기 한 쌍을 주며 사이좋은 부부로 한평생 살아가자는 마음을 신부에게 전했던 거예요. 여러분이 앞으로 커서 성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깨닫고 사회인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관례를 치르는 소년은 먼저 어른이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 갈아입어요.


그러나 경상좌병영이 새로 완향곡을 운영하면서 주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박지원이 집필한 호질이라는 소설에서도 말하는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선비 정신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선비라고 자칭하는 사람과 관직에 올라가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부패한 양반들을 호랑이가 꾸짖으며 비판하는 소설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며 타락한 양반인 북곽 선생은 퇴비통에서 뒹굴기까지 하며 빌고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선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왕에게 항소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왕을 뜻하는 호랑이 앞에서는 정작 살려달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으로, 호질은 일종의 풍자 소설에 해당한다.


허나 조선의 역사상 유래 없는 평화로 군사력이 약해진 결과 교린 정책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 뒤 1655년의 통신사는 일본이 ‘가도조선’(假道朝鮮)한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1682년은 대마도와의 무역통제를 위한 7개 조의 조시약정(朝市約定)이었다. 1711년의 통신사는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의 외교의례 개정에 대한 국가의 체면 유지와 일본과의 계속적인 우호관계가 목적이었다.


게다가 오른쪽 아래편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뒤쪽으로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들어 올려진 사람은 오른쪽 아래쪽으로 내동댕이 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승부는 곧 결정될 것이고, 씨름판에는 함성이 울려퍼지겠죠. 우선, 씨름 선수들이 샅바를 매지 않았는데, 이런 씨름을 바씨름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왼쪽 상단을 보면 이미 갓과 신발을 벗고 대기 중인 선수가 있습니다. 갓이 두 개 포개진 것으로 보아 그 윗사람 역시 갓을 벗고 준비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다음 번에 씨름판에 나갈 선수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명나라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상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와 함께 조선에 파병돼 일본군과 싸운 포르투갈 용병들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선진화된 문물을 갖춘 용병을 '해귀(海鬼)'라 불렀다. 평소 명(明)은 일본 다이묘들이 하는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 번씩 조공하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고 패도(佩刀)하고 오면 구적(寇賊)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명을 향한 사대 외교는 명을 대상으로 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보다 강국인 명을 대상으로 하여 왕의 권력 안정을 확보하려는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이면서 공무역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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